Poster_2015

최근 연락이 뜸했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베트남 전쟁 관련 전시 일을 하는데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마침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는 상태였던 나는 선배의 부탁에 흔쾌히 응했다. 약 한 달간, 꼼꼼한 성격의 선배와 다시 일하게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시간적 여유도 있고 전시 일을 하며 무언인가 배우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선배는 먹는 것 하나, 돈 쓰는 것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전시회 일을 하며 함께 인근 시장엘 갔는데 제품 성분부터 원산지, 거리 계산 등 하느라 30분이면 될 걸 2시간이나 걸려 장을 봤다. 그러면서 선배는 관심 없는 날 위해 하나하나 설명해줬고 착한 소비가 나라와 지구를 살린다고 했다.

베트남 종전 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전시. 전시회를 하며 나는 도서관 등에서 자료를 빌려보며 공부했다. 단지 우리나라가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만 알았던 나는 자료를 하나하나 보며 충격에 빠졌다.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더욱이 일제 식민지와 6.25를 거친 우리 민족이 저지른 일이라곤 믿기지 않은 한국군 베트남 양민학살. 더 충격적인 것은 친척 중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신 어르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명절날 그 어르신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있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하셨다.

전쟁에 대해 깊이 알수록 인터넷과 책에서 본 그들의 모습들이 아른거렸다. 며칠 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시회를 마치고 일주일 후 또 다시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베트남 가자"

선배는 앞뒤 가리지 않고 말했다. 전시회 중간 중간에도 선배는 베트남에 갈 것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내 뱉는 말은 꼭 하고 마는 성격인 선배인지라 나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떠나기 전, 식당은 차치하고 숙소조차 마련하지 않은 우리였다. 선배는 가면 다 해결된다고만 했고 사전에 꼼꼼히 다 준비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비행기 안에서 4시간이 넘는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깊은 잠에 빠져버린 선배. 사실 초조한 마음에 여행 떠나기 전 몇 유명한 어플로 호텔을 검색했었다. 베트남에도 생각보다 많은 호텔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나와 있었고 혹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묵을 요량이었다.

호치민 공항에서 내리자 이 나라의 특유 향기가 났다. 후텁지근한 날씨 내리쬐는 해가 눈부셨다. 공항 밖 풍경에 빠진 동안 선배는 택시를 잡았다. 뭘 꾸물거리냐며 어서 타라고 했다. 베트남 여행이 처음이라는 선배의 행동은 너무 능숙했다.

나는 선배에게 오늘 숙소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배는 오늘 베트남 중부로 간다고 했다. 전쟁피해 지역은 주로 중부에 있었다. 하지만 호치민에서 중부까지는 꽤 먼 거리다. 우리는 허름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 기내식만 먹었던 터라 허기가 졌다. 공항 옆 시내에서 좀 근사한 베트남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선배가 안내한 허름한 국수집에서 대충 요기를 떼웠다.

밤이 늦어서야 베트남 중부에 있는 도시 다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버스에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숙소까지 정해지지 않았으니 죽을 맛이었다. 선배 역시도 피곤한 얼굴을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다낭의 작은 터미널 인근에 다행히 숙소가 몇 개 보였다. 나는 이것저것 따질 세도 없이 선배가 가는 숙소로 향했다. 선배는 몇 숙소를 지나쳤다. 내가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데 무언인가 찾는 것 같았다. 체크인을 하는 동안 나는 팔이 없는 늙은 주인을 보았다. 어쩌다가 팔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녀가 전쟁으로 팔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선배는 일부러 전쟁 피해자의 숙소로 온 것이다. 이튿날 선배는 숙소 주인의 손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아침밥을 먹을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남자는 인근에 있는 쌀국수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짧은 영어로 자신의 할머니는 한국인을 싫어했다고 했다. 아주 예전 일이라며, 우리는 왜 그런지 묻질 않았다. 대부분의 전쟁피해자들은 한국인을 싫어할 것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버스를 2시간이나 타고 작은 마을로 이동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학살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몇 미터 걷자 마을 입구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선배는 멈춰서서 비석을 바라봤다. 나는 순간 그 비석이 '한국군 증오비'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시회 내내 사진으로 봤던 그 비석이다. 어두운 돌로 되어 있어 안의 글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군에 대한 증오의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증오비를 세웠을까. 증오비를 보니 마을을 향한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을은 평화로웠다. 40년 전에 그 끔찍한 일이 진짜 일어났을까 의심될 정도로 우리네 시골과 다름 없었다. 마을 어귀 커다란 나무에서 사람들이 나와 수다를 떨고 아이들 몇과 동네 개가 뛰어다녔다. 나는 선배가 저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걸꺼라 생각했다. 한참 그들을 바라보는 선배에게 '안가요?' 라고 물었다.

"됐어. 우리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니. 그냥 마을이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선배의 말을 듣고 보니 실제 그랬다. 베트남 학살을 수년간 취재한 어느 기자 역시 그들을 만나는 게 고통이라고 했다. 그 기자보다 한국인을 만나야 하는 그들이 더 고통스러워했다고 했다.

선배와 나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작은 식당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고 구멍가게에서 물과 음료 등을 샀다. 난 우리가 이 곳에 와서 거창한 무언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마을에 와보니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이곳에 와서 이들이 먹는 음식 먹고, 이들이 자는 곳에서 자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선배가 말했다. 난 여행 오기 전 선배가 '착한 여행 하자'는 말을 듣고 좀 걱정이 됐다. 어떻게 해야 착한 여행인 것인지. 하지만 여행 막바지 그녀가 던진 말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창하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게 꼭 아니라는 것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건 한쪽 팔이 없는 주인 할머니였다. 그녀는 베트남 말로 작게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나쁜 말은 아니란 걸 알았다.

"조심히 잘 다녀왔냐고 묻는 거예요. 할머니가 당신들을 걱정했어요. 내가 당신들이 전쟁 피해 마을을 갔다고 말했거든요."

할머니의 손자의 말에 마음이 애잔해 옴을 느꼈다. 그들이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괜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마을 입구 증오비가 그들 마음 속 깊이 세워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 역시 아니었다. 각종 편견에 휩쌓여 있었던 건 오히려 나였다. 매사 많은 것들을 어려워하고 하기 싫어했다. 나 하나로 뭐가 되겠어?라는 편견에 30년 넘는 삶을 허비했던 것 같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여행. 여행 중 거창하게 한 건 없지만 아름다운 여행이었다는 건 자부한다.

아름다운 여행

박효연 | 일반 부문

베트남 종전 40주년 맞아 전시회를 준비하던 나는 선배와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난다. 평소 착한 여행, 윤리적 소비를 강조한 선배를 믿고 따른 여행이다. 베트남 여행 중 방문한 한국군 학살 마을. 마을 입구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진 것을 보고 무거운 마음을 느낀다. 이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뭔가 거창한 것을 해야 하는건 아닐까.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거창하게 할 건 없었다. 그저 그들이 먹는 음식, 자는 곳에서 같이 생활해 보는 것.
30년 넘는 삶을 살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나에게 이번 여행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해 해준 아름다운 여행이다.